이태원에 사는 여자친구를 데려다 주고 가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귀갓길이었습니다.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 잠시 들린 조 씨를 여자친구는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어린 조카의 사진을 찍어주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는 23살 대학생은 그렇게 싸늘한 주검으로 변했습니다.
1997년 4월 3일 밤 9시 50분에 일어난 사건. ‘이태원 살인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진 사건입니다.
■ 이유없는 광기와 살의..23살 대학생의 목숨 앗아간 17살 아더 패터슨
이태원 살인사건을 아는 사람들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 아더 패터슨. 패터슨은 멕시코계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17살 청소년이었습니다.
그는 그날 미군 부대 안의 학교 안에서 친해진 재미교포 에드워드 리 등 친구 몇 명과 햄버거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주머니에서 꺼내 든 칼을 친구들에게 자랑하던 패터슨은 잠시 뒤 에드워드 리와 함께 화장실로 들어갔습니다. 화장실로 향하기 전 둘이 나눈 대화는 이랬습니다.
“뭔가 멋진 걸 보여줄 테니 화장실에 가자” (I’m going to show you something cool. Come in the bathroom with me)
그들의 뒷모습에는 치기 어린 만용을 넘어서 광기와 살의가 서려 있었습니다.
처참했던 피해자의 모습은 법원 판결문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화장실에 먼저 들어선 에드워드는 세면대 앞에서 손을 씻는 척하면서 피해자를 지켜봤습니다.
뒤따라 들어온 패터슨은 소변을 보던 피해자를 슬쩍 바라본 뒤 화장실 곳곳을 살피며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습니다. 그리고는 오른손에 든 흉기로 피해자의 목을 찌르기 시작했습니다.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고 뒤를 돌아본 피해자를 다시 찔렀고 오른팔로 막아보려던 피해자를 다시 재차 공격했습니다.
패터슨은 4층의 다른 화장실로 올라가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건물 밖으로 나왔고 범행에 사용한 흉기를 하수구에 버린 뒤 피묻은 옷을 불에 태웠습니다.
병원으로 옮겨진 피해자는 과다 출혈로 숨졌습니다.
■ 살인범에게 불기소 처분..출국금지 요청 잊어버려 해외도주 방치한 검찰
패터슨을 체포한 미군 범죄수사대(CID)는 사건 발생 6일 만에 살인범은 패터슨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온몸에 피가 묻어 있었던 점을 근거로 범행에 사용된 흉기와 불태우고 남은 패터슨의 옷도 찾아내 모두 한국 검찰에 넘겼습니다.
그러나 당시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담당 수사검사인 박 모 검사는 패터슨의 살인 혐의에 대해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불기소처분을 내렸습니다.
박 검사가 살인자로 꼽은 사람은 당시 화장실에 같이 있었던 에드워드였습니다. 에드워드는 강하게 반박했습니다. 대법원까지 가는 2년 5개월의 법적 다툼 끝에 에드워드는 무죄가 확정됐습니다.
미군 수사대의 결론을 뒤집으면서까지 수사기관이 지목한 살인범의 무죄가 확정된 당혹스러운 상황. 무너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진범을 찾아 나선 사람은 피해자의 부모였습니다.
에드워드의 무죄가 확정되자 피해자의 부모는 패터슨을 살인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패터슨은 다시 조사를 받게 됐고 세 차례에 걸쳐 9개월 동안 출국이 정지됐습니다.
그런데 3번째 출국정지가 끝나던 1999년 8월 23일, 패터슨의 출국정지가 풀려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담당 검사가 패터슨의 출국정지 연장을 요청하는 걸 그만 잊어버리고 만 겁니다.
판결문에는 검사가 자신의 부하직원이 유흥주점에서 뇌물을 받아 구속되면서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경황이 없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검사는 며칠 뒤 주로 대형비리 사건을 수사하는 검찰 특수부로 인사발령이 났고 뒤늦게 부랴부랴 출국금지 연장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늦은 뒤였습니다. 패터슨은 틈을 놓치지 않고 출국정지가 풀린 바로 이튿날 미국으로 출국한 상태였습니다.
■ “법이라는 것이 이렇게 잔인할 수 있습니까”..21년을 버틴 어머니의 눈물
재판부는 당시 검사들의 수사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패터슨을 살인범으로 본 경찰과 미군 범죄수사대의 견해는 수집된 증거와 여러 목격자의 진술로 내려진 합리적인 의견이었다. 그러나 담당 검사는 기본적인 원칙조차 없이 수사를 했고 어떤 합리적인 근거도 없이 패터슨의 진술을 진실로 믿었다.
에드워드의 무죄가 확정되면서 피해자 부모가 패터슨을 고소하고 몇 년 동안이나 수사를 요청했지만 10년이 지난 2009년 12월에야 한국으로 보내달라는 뒤늦은 범죄인 인도청구를 했다. 이 과정에서 살인사건의 실체적 진실 규명은 20년 가까이 지연됐고 진상 규명에 대한 피해자 가족들의 기대가 장기간 침해됐다.
피해자 가족들이 패터슨을 고소하려고 할 때 검찰청 민원실에서는 일사부재리 원칙을 거론하며 고소장 접수를 거절했고 며칠 뒤 가족들이 언론사 기자들의 도움을 받아 재차 고소장을 접수하려고 하자 그제야 담당검사가 직접 내려와 고소장을 접수했다.
검사는 패터슨이 미국으로 출국한 뒤였음에도 출국정지 조치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피해자 가족들에게 말했던 사실도 있다. 가족들이 10년 넘게 진상을 밝혀줄 것을 간절히 요구하고 수사 진행 상황을 문의했지만 응답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2018년 7월 26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48민사부 판결문에서 발췌)
재판부는 ‘이태원 살인사건’ 수사에서 저지른 검찰의 부실 수사를 인정하며 국가가 3억 6천만 원을 배상하라고 지난 26일 판결했습니다.
힘겨운 재판을 이어오던 피해자의 어머니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20년 전에 수사를 잘못하면서 살인범들이 다 밖으로 나오고 가족들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집 팔아서 변호사 비용 대고 큰딸 전세금, 딸들 퇴직금.. 온 식구가 이렇게 21년째 버티고 살았습니다. 법이라는 것이 이렇게 억울한 사람에게 잔인할 수 있습니까. 범인 놈들도 나쁘지만 검사도 우리한테는 범인 못지않게 잘못했습니다.”
패터슨은 지난 2015년 도주 16년 만에 국내로 송환됐고 지난해 징역 20년 형이 확정돼 죄값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살인범에 대한 단죄와 21년 만에 이뤄진 배상 판결로도 절대 값을 치르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23살로 세상을 떠난 피해자가 그토록 사랑했던 가족들의 지난 21년 세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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