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드디어 중화민국
지금의 대만이 만들어지다
1,2차 아편전쟁과 청불전쟁 게다가 청일전쟁까지 패배한 청나라
저번편에서 말했다시피 서태후의 망테크 이후 이빨 다 빠진 아시아의 호랑이가 되었습니다.
서태후는 정말 웃기게도 뒤늦게 자기가 광서제가 하려던 것 제대로 못하게 막았던 양무운동과 변법자강운동과 비슷한 것들 을
나라 다 말아먹고나서 다시 시작합니다.
뒤늦게 1900년대 초 청나라에 서양식 학교가 40000개가 넘게 생기기 시작했고
젊은 서양식 교육을 받는 학생들만 130만명.
교직원들도 6만명이 넘게 되었죠.
그런데 당시 서양식 교육받은 수 많은 젊은이들이 청나라를 뒤집자고 얘기합니다.
일본처럼 민주주의나 국회같은 제도를 만들어야한다면서 말이죠.
그런데 살짝 무조건 일본을 따라하자고만 얘기하는 젊은이들도 정말 많이 생겼었습니다.
그들은 친일파였던 것일까?
이 상황에 대해서 분명하게 상황을 이해하고 넘어가야하는데
당시 여러 내부적 요인도 많았지만 어찌되었든 일본이라는 나라가 하두 어그로를 끌어서
청나라 뿐 아니라 조선도 개판이었습니다.
당시 청나라든 조선이든 돈 좀 있는 집 아들내미들 중 일본 유학파가 상당히 많이 있었는데
그 아들내미들이 무작정 일본처럼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민족주의나 국가적 감정을 제외하면 아시아에서 거의 유일무이하게
무너져가던 수 많은 국가들과 정 반대로 발전하고 있던 나라는 일본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일본은 저렇게 강력해지고 있는데 도대체 왜 조선과 청나라는 이모양 이꼴인가
그래서 조선에서도 김옥균이나 박영효같은 젊은이들의 갑오개혁도 있었던겁니다.
그런데 한가지 큰 착각이었던 것은 무작정 일본처럼 민주주의같은 제도만 도입하면 나라가 부강해진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굉장히 많이 있었다는것.
당시 청나라 안에는 일본처럼 입헌군주국
즉, 왕은 그냥 짜져있고 정치는 국회가 돌아가는 일본과 같은 정치를 하면
청나라도 무작정 발전할 수 있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합니다.
당시 1894년 진작에 중국대륙을 갱생시켜야한다는 단체가 있었으니
바로 그 유명한 현재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 모두의 국부
쑨원이 설립한 흥중회였습니다.
저 흥중회의 깃발은 또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인데
중원을 점거한 만주족과 청국을 주멸한다.
주멸한 결과로, 중원을 회복한다.
회복한 결과로, 중원에 민주적인 국가를 수립한다.
아무튼 흥중회의 목표는 이러했습니다.
이 흥중회는 훗날 중국 동맹회라는 한족 중심의 지식인들이 모인 단체로 점차 커집니다.
민족 민권 민생
삼민주의를 기반으로 말이죠
사실 저 삼민주의에서 민족은 ‘민족’이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한편으로는 한족 빼고는 중국대륙에서 소수민족들은 입다물으라고 했었으니
조금 모순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무튼
1901년 11월7일
청나라의 기둥이자 강력한 군벌세력이었던 이홍장이 죽습니다.
이홍장의 군벌세력을 물려받은 인물이 있었으니.
위안스카이( 원세개)
(1859.8.20~1916.6.6)
바로 위안스카이었습니다.
과거 임오군란 이후 흥선대원군을 납치해서 텐진에 연금했던 인물로 유명하죠.
1908년 11월15일
그리고 이후 1908년에는 드디어 서태후도 죽습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이아줌마 죽기 딱 하루 전날
저번편에서 그렇게 오지게 서태후와 싸우며 양무운동 변법자강하려던 광서제가 죽었는데
현재 서태후가 자기 죽기 하루 전에 독살했다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서태후는 자기 죽기 하루 전날 광서제 죽이더니 다음 황제를 정합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 선통제였죠.
그런데 자세히보면 1908년에 황제가 되었는데
1906년 2월7일 생.
이양반. 생년월일 060207 이셨습니다.
즉 세살짜리 애가 황제가 되었던거죠.
불과 3살짜리 애기가 청나라 황제가 되었으니
뒤에서 친아빠 순친왕이 수렴청정을 시작합니다.
이홍장과 서태후가 죽은 이후 청나라는 대혼란의 시작이었습니다.
서로 지들이 잘났다며 서로 권력가지고 싸우는 일들이 허다했고
의화단운동 이후 청나라가 서구열강에게 지불해야할 배상금만 4억5000만냥
안그래도 힘든 농민들은 배상금 쳐갚아야한다며 삥뜯는 청나라 자금성을 때려부시고 싶었습니다.
1906년 199회
1907년 188회
1909년 112회
1910년 266회
농민봉기는 하루 이틀에 한번꼴로 오지게 자주 일어나고 있었죠.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납니다.
신해혁명은 단순히 저 땅에 있던 청나라라는 왕이 다스리는 국가가 짜증나고 거지같아서 뒤집어 엎은게 아니라
저 땅에 살던 여진족. 즉 만주족의 왕이 다스리던 국가가 짜증나고 거지같아서
한족이 다시 뒤집어 엎은 사건
겉으로 볼 때는 민주주의 국가 공화국을 세우려는 것이 목표였지만
수 많은 중국대륙에서 신해혁명을 지지하던 국민들. 즉 한족들의 마음 속에는
민주주의고 나발이고 떠나서 다시 한족의 국가가 드러서기를 간절히 희망하면서
한편으로 개판이었던 청나라를 멸망시키고자 했던
마음이었습니다.
신해혁명이 터지면서 청나라의 군권을 위임받고 이홍장에게 덥썩받은 북양군대를 동원해서 신해혁명을 조지게된 위안스카 이.
그런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역시나 이번에도 신해혁명 군대와 전쟁안하고 화해를 하자고 요청합니다.
정말 줄 잘타는건 신의 한수였던 인간이었습니다.
한편 이렇게 청나라 전체에서 여러 민란이 발생하고 있을 무렵 쑨원은 미국에서 혁명에 필요한 돈 후원해달라고 여기저기 댕기고 있었는데
청나라에서 신해혁명 일어났다는 얘기듣고 전쟁 거의 다 끝나고 위안스카이랑 화해하고 앉아있을 때 뒤늦게 합류합니다.
그리고 난징을 임시정부로하는
1912년 1월 1일
다시 새로운 대륙의 주인이 한족이 된
삼민주의를 기반으로한
중화민국이 탄생합니다.
그리고 쑨원은 Republic of china의 임시 대총통이 됩니다.
그렇게
이 중국대륙에는
명나라가 망한 1644년 이후 267년만에
다시 한족의 국가가 드러섭니다.
이후 1912년 3월10일 위안스카이는
쑨원에 이어 중화민국 2대 임시 대총통에 정식 취임하면서
청나라는 역사속으로 사라집니다.
주원장 농민의 난으로 원나라 멸망시키고 세워졌던 명나라
이자성이라는 농민의 난으로 망한 명나라 그 사이에 여진족에 의해 생겨난 청나라
그 여진족 국가 청나라는
다시 한번 한족에 의해 멸망합니다.
이후 1913년 2월 중화민국 제1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쑨원의 국민당은 압도적 승리를 거두게됩니다.
그렇게 3대임시대총통 때부터는 위안스카이 발로 차버리고 국민당이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죠
그러나 이후 쑨원은 과욕을 부르게 됩니다.
계속해서 국민당 지들이 강력한 다수당이 되어야한다는 욕심때문에
당시 중국대륙 내부에 있던 공산주의자고 뭐고 자기들과 정치적 노선이 다르든 말든 닥치는대로 끌어모으는데
그것 때문에 오히려 국민당의 정체성이 박살나면서 지지율도 박살납니다.
아무튼 저모양 저꼴로 중화민국이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저 국기에 면상 박혀있는 황제가 꿈이었던 임시대총통 위안스카이가
쑨원과 중화민국 혁명세력들 말을 들어줄 리 만무했습니다.
발로 빵차버리고 혁명파들을 몰아내려는 수작에 착수합니다.
이제 청나라가 사라지니
얘네 둘이 싸우는 구도로 바뀌게됩니다.
그러나 군사력 딸려서 위안스카이 힘빌려서 청나라 몰아낸 쑨원과 혁명세력
그 힘빌린 위안스카이를 쑨원과 혁명군들이 이길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쑨원과 주요 건국요인들은 1913년 7월 일본으로 런을 하죠.
드디어 위안스카이의 삽질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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